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튜튼 기사단 (문단 편집) == 역사 == [[독일인]]을 중심으로 [[북유럽]]과 [[동유럽]]의 독일인 [[기사]]로 구성되어 '독일 기사단'으로도 불린다. 현대 [[독일]] 및 [[오스트리아]]에서는 주로 '도이치(독일) 기사단'(Deutscher Orden)으로 부른다. 튜튼이라는 이름은 [[고대 그리스]], [[고대 로마]]에서 고대 [[게르만족]]의 한 부족인 테우토네스(Teutones,Τεύτονες)[* 테우토네스는 [[유틀란트 반도]] 북부의 티(Thy) 지방에 살던 부족으로 [[기원전 1세기]]경 [[유틀란트 반도]]의 [[기후 변화]]로 인한 기근으로 인해 유틀란트 반도에 살던 다른 부족인 킴브리족, 암브로니족, 티구리니족 등과 함께 따뜻한 남쪽으로 대이주를 시도하다가 [[로마 제국]]과의 [[킴브리 전쟁]]으로 인해 멸망했다.]에서 유래한 것으로 이는 사람, 부족이라는 의미를 지닌 [[게르만 조어]]의 'Þeudanōz'에서 유래하며,[* 실제로 이들의 원 출신지로 비정되고 있는 티(Thy) 지방도 어원이 이 단어이다.] 이 단어는 Deutsch(도이치)의 어원과도 같기 때문에 실제로 영미권에서는 근대까지만 해도 독일인들을 튜튼인(Teutons)이라고 자주 칭했다. 1190년 아크레 공성전에서 창설된 야전병원이 모체로, 1192년 [[가톨릭]] [[교황]]으로부터 기사단 조직 인가를 받은 뒤 구호 집단으로 활약하다가 1198년 군사 기사단으로 전환했다. 초기에는 다른 [[십자군]] 및 여타 기사단과 함께 [[성지]] [[예루살렘]]과 주변 지역에서 활동했으나, 1211년 [[헝가리 왕국|헝가리]] 국왕 [[언드라시 2세]](II. András, 재위: 1205 ~ 1235)의 권유로 [[트란실바니아]]로 이주, [[카르파티아 산맥]] 동쪽 [[쿠만족]]의 침입을 받고 있던 헝가리를 구원했다. 이후 트란실바니아 지역의 방어 및 [[동방식민운동|독일인의 이주를 통한 개척]] 역할을 수행하다가 1225년 언드라시 2세와 갈등을 빚자 교황의 지원을 받아 독립을 시도하다가 언드라시 2세의 분노를 사 헝가리에서 쫓겨났다. 1226년에 당시 기사단장이던 [[https://en.wikipedia.org/wiki/Hermann_von_Salza|헤르만 폰 잘차]]는 마조프셰 공작 콘라트 1세(Konrad I Mazowiecki)[* 당시 프로이센 지역의 원주민들과 전쟁을 벌이고 있었고, 도움을 받을 목적으로 독일계 기사들을 초청했다. 그 독일계 기사의 후신인 프로이센과 독일 제국, 나치 독일이 폴란드에 어떤 짓을 저질렀는지를 생각한다면 [[만악의 근원]]이라고 볼 수도 있다.]의 요청으로 헤움노(쿨름)[* 기사단이 거점을 세운 헤움노는 [[토룬]](토른) 서쪽 지역이다. 훗날 나치 [[헤움노 절멸수용소|절멸수용소]]가 세워진 헤움노는 [[우치(폴란드)|우치]] 근처다.] 지역에 거점을 마련한 뒤, 리미니의 [[금인칙서]]를 통해 프로이센 지역의 소유권을 인정받고 콘라트와 함께 프로이센 원주민에 대한 [[북방 십자군|북방 십자군 전쟁]]에 나선다. 기사단은 이 지역의 [[그리스도교]] 신자들을 규합하여 [[발트 신화|이교도]]를 격퇴하는 임무를 맡아 이교도 원주민을 정복하고 독일 동부 농민들을 이주시켜 프로이센 일대에 [[독일 기사단국]]을 세웠다. 1237년에는 [[리보니아 검우 기사단]]을 흡수하여 프로이센에서 [[에스토니아]] 일대를 장악하고, 1242년 [[동방정교회|러시아 정교회]]를 무너뜨리고 [[가톨릭]]을 전파하기 위해 [[유럽 러시아|러시아]]로 진격했지만, [[노브고로드 공국]]의 [[알렉산드르 넵스키]]에 의해 페이푸스 호 전투에서 대패를 당하며 러시아 정복은 좌절되었다. 1260년에는 튜튼 기사단 영지에서 헤르쿠스 만타스(Herkus Mantas, ?~1273)[* 기사단과 싸우다가 전사했다. 프루스인이 소멸한 탓에 친척뻘인 [[리투아니아]]에서 민족 영웅으로 밀어주며, 1972년에 [[소련]] 소속이었던 리투아니아에서 그가 주인공인 [[https://lt.wikipedia.org/wiki/Herkus_Mantas_(filmas)|전기 영화]]를 만들기도 했다.]가 이끈 프루스인들이 대대적인 반란을 일으켜서 많은 기사들이 전사하였다. 기사단은 독일로부터 다시 기사들을 영입하고, 프루스인들을 대대적으로 학살 및 추방하여 반란을 진압하고 후에 부족해진 인구는 독일에서 이민을 받음으로써,[* [[동방식민운동]] 참조.] [[동프로이센]]의 독일화를 부추겼다. 1291년에는 리투아니아 원정을 단행하여 리투아니아의 상당 부분[* 오늘날의 [[클라이페다]]에 해당하는 '소 리투아니아' 지역과 리투아니아 북서부인 [[사모기티아]] 지역.]을 장악하였고, 14세기가 되어 독일 기사단국은 [[발트해]] 연안과 [[폴란드]] 북부, 독일 동부를 지배하는 동유럽의 새로운 강자로 부상했다. 그러나 14세기 이후 튜튼 기사단에게 많은 영토를 빼앗긴 리투아니아 대공 [[요가일라]]가 폴란드 앙주 왕조의 [[야드비가]] 여왕과 결혼, 두 나라가 동군연합 관계가 되고, 그 힘으로 기사단 국가를 압박하기 시작했다. 결국 기사단은 1410년 [[그룬발트 전투]]에서 1.5배 규모의 폴란드-리투아니아군[* 독일 기사단 2만 7천여 명, 폴란드-리투아니아군 3만 9천여 명.]을 상대로 싸우다가 대패하면서 많은 영토를 잃고 세력이 크게 축소되었다. 이 전투에서 튜튼 기사단의 고위 간부들이 상당수 전사해 버리는 사태가 발생했으나, 폴란드-리투아니아 연합군이 기사단의 본부인 [[말보르크 성|마리엔부르크]] 공략에는 실패하고 퇴각함으로써 그나마 한숨 돌릴 수 있었다. 하지만 이 전투로 기사단의 군사력은 거의 붕괴되었고, 위신은 땅에 떨어졌다. 이후 1454년부터는 1466년까지 13년에 걸쳐 폴란드와 전쟁을 벌였다가 패배하여 기사단국의 기존 수도였던 [[마리엔부르크]]와 비옥한 [[비스와 강]] 하역, 무역 중심지였던 [[그단스크]], 마조프셰의 콘라트가 봉토로 주었던 헤움노(Chelmno) 등을 모조리 잃고 독일 기사단국의 기사단장이 폴란드 왕의 신하가 되었고 수도를 훗날 [[쾨니히스베르크]]로 천도했다. 이후 1525년 기사단장 [[알브레히트(프로이센)|알브레히트 폰 호엔촐레른]]이 [[루터교회]]로 개종하고 [[폴란드 왕국]]의 봉신으로 충성을 맹세, [[프로이센 공국]]을 세우고 공작이 되면서 독일 기사단국은 프로이센으로 계승되고 동프로이센 쪽의 기사단은 가톨릭 교황과 단절되었다. 그 후 [[신성 로마 제국]]과 동유럽에 작은 형태의 영지가 유지되었으나 1808년 [[나폴레옹 전쟁]]의 결과로 신성 로마 제국이 해체되면서 기사단 국가의 남은 영지가 몰수되고 기사단 조직도 소멸했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